은퇴 전의 경력에는 생계와 사회의 평가가 함께 따라다녔다.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해야 하는 일이 있었고, 성과와 수입, 직위와 인정이 경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그러나 은퇴 후에는 같은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남아 있는 시간이 유한하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질문이 달라진다. 얼마나 성공할 것인가보다 남아 있는 시간을 무엇에 사용할 것인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경험하며 살아갈 것인가가 더 중요해진다.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은퇴 후 경력’이라는 새로운 질문을 시작하려 한다.
은퇴 전에는 무엇을 이루었는지, 얼마를 벌었는지, 어떤 위치에 올랐는지가 경력을 설명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은퇴 후의 경력을 같은 기준으로 평가하면 새롭게 시작하는 많은 일들이 하찮아 보일 수 있다. 악기를 배우는 일,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는 일, 가족을 돌보는 일, 여행하고 기록하는 일은 반드시 수입이나 사회적 지위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가치 없는 것은 아니다. 은퇴 후에는 성공의 크기보다 내가 남은 시간을 어디에 사용했는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배우고 경험했는지가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냥 살아도 10년은 가고, 무엇인가를 배우고 새로 시작해도 10년은 간다.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이 나이에 굳이 이것을 해야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나는 가능한 한 안 하는 쪽보다 하는 쪽을 택하고 싶다. 잘해야만 시작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어떤 성과를 만들어야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시작하고 배우고 경험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흐른다. 은퇴 후의 경력에서 중요한 것은 그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며 살아가는가일지도 모른다.
새로운 것을 시작한다는 것은 낯선 상태를 받아들이는 일이다. 처음 배우는 사람으로 돌아가야 하고,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견뎌야 하며, 시작한 일이 어디까지 갈지도 알 수 없다. 은퇴 전에는 익숙함과 전문성이 나를 지켜주었다면, 은퇴 후에는 오히려 낯섦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마음이 새로운 경험의 문을 열어줄 수 있다. 공부를 다시 시작하고, 새로운 악기를 배우고, 여행하고, 글을 쓰는 일도 모두 어느 정도의 낯섦을 감수해야 한다. 나는 은퇴 후의 새로운 경력은 그 낯섦을 피하지 않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 개념과 기록 축적 중 · 『은퇴 후 경력』 집필 구상 단계